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사생아로,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군인으로 활동하며 1527년 로마 약탈에 참여했고, 이후 아버지의 영향으로 교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534년,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파르마 공작과 피아첸차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카스트로 공작령과 라치오의 론시글리오네 백작령을 소유했다. 그러나 잔혹하고 사치스러운 통치 방식으로 인해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1547년 암살당했다. 그는 지롤라마 오르시니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사생아 아들 오라치오 파르네세도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세기 성소수자 사람 - 토르콰토 타소
토르콰토 타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서사시 《리날도》, 목가극 《아민타》, 대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등의 작품을 남기며 유럽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세기 성소수자 사람 - 다케다 신겐
다케다 신겐은 가이 겐지 출신으로 센고쿠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가이의 호랑이'라 불리며 우에스기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마가와 요시모토, 호조 우지야스와의 동맹, 오다 노부나가와의 일시적 동맹,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 파르네세가 - 카를로스 3세 (스페인)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국왕으로, 파르마 공작과 나폴리-시칠리아 왕을 거쳐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계몽 군주였으나, 예수회 추방, 빵 폭동, 식민지 반란 등의 어려움도 겪으며 스페인 제국의 절정기와 사회적 혼란을 동시에 경험했다. - 파르네세가 - 오타비오 파르네세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의 공작으로서, 파르네세 가문의 권력 유지 및 확장, 도시 계획, 경제 개혁, 문화 예술 후원에 기여했으며, 공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 파르마 공작 - 카를로스 3세 (스페인)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국왕으로, 파르마 공작과 나폴리-시칠리아 왕을 거쳐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계몽 군주였으나, 예수회 추방, 빵 폭동, 식민지 반란 등의 어려움도 겪으며 스페인 제국의 절정기와 사회적 혼란을 동시에 경험했다. - 파르마 공작 - 파르마 공작 필리포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아들이자 부르봉-파르마 왕가의 시조인 파르마 공작 필리포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파르마 공국을 얻어 통치하며 경제 회복과 교육, 철학 장려에 힘쓴 계몽주의 군주였다.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503년 11월 19일 |
출생지 | 로마, 교황령 |
사망일 | 1547년 9월 10일 (43세) |
사망지 | 피아첸차, 파르마-피아첸차 공국 |
배우자 | 제롤라마 오르시니 |
자녀 | 추기경 알레산드로 오타비오, 파르마 공작 추기경 라누치오 비토리아, 우르비노 공작부인 오라치오, 카스트로 공작 |
가문 | 파르네세 가문 |
아버지 | 교황 바오로 3세 |
어머니 | 실비아 루피니 |
작위 | |
작위명 | 파르마 공작 |
재위 기간 | 1545년 9월 16일 – 1547년 9월 10일 |
후임 | 오타비오 파르네세 |
2. 초기 생애
피에르 루이지는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교황 바오로 3세가 되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사생아였다.[1][2] 그는 군인이 되어 1527년 로마 약탈에 참가하였다.
1534년 그의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피에르 루이지는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교황령의 일부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피에르 루이지는 잔혹하고 냉정하며 사치스럽다는 평판을 얻었고, 어린 사내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성애 행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1]
2. 1. 출생과 가문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는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교황 바오로 3세가 되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사생아였다.[1][2] 그는 군인이 되어 1527년 로마 약탈에 참가하였다.1505년 7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피에르 루이지가 파르네세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그를 적자로 인정했다.[1] 1513년 6월 23일, 교황 레오 10세는 피에르 루이지를 적자로 인정하는 두 번째 문서를 발표했다.[2] 이러한 적자 인정에도 불구하고, 사생아라는 사실은 평생 그를 괴롭혔으며, 피아첸차의 귀족들은 그를 "교황의 사생아"라고 모욕하기도 했다. 그는 "트란퀼루스"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인문주의자 발다사레 말로소 디 카살마조레를 가정교사로 두었고, 곧 전쟁과 요새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그의 아버지는 피에르 루이지를 파르네세 가문의 진정한 수장으로 만들고자, 로도비코 피틸리아노 백작의 딸 제롤라마(지롤라마로도 표기) 오르시니와 결혼 동맹을 맺도록 주선했다. 1513년에 약혼 계약이 체결되었고, 1519년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제롤라마는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아내로 남아 피에르 루이지의 잔혹함과 사치를 꿋꿋하게 참아냈다. 그라돌리 궁전 건설 지연으로 젊은 부부는 발렌타노 성에 머물렀으며, 이듬해 그들의 첫 아들 알레산드로가 태어났다.[3]
2. 2. 교육과 결혼
피에르 루이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1503년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실비아 루피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1505년 7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피에르 루이지가 파르네세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적자로 인정했다.[1] 1513년 6월 23일, 교황 레오 10세는 피에르 루이지를 적자로 인정하는 두 번째 문서를 발표했다.[2] 이러한 적자 인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피아첸차의 귀족들은 그를 "교황의 사생아"라고 모욕하기도 했다. 그는 "트란퀼루스"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인문주의자 발다사레 말로소 디 카살마조레를 가정교사로 두었고, 곧 전쟁과 요새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그의 아버지는 피에르 루이지를 파르네세 가문의 진정한 수장으로 만들고자, 로도비코 피틸리아노 백작의 딸인 제롤라마(지롤라마로도 표기) 오르시니와 정략결혼을 맺도록 주선했다. 1513년에 약혼 계약이 체결되었고, 1519년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도 제롤라마는 충실하고 헌신적인 아내로 남아 피에르 루이지의 과도함, 잔혹함, 사치를 꿋꿋하게 참아냈다. 그라돌리 궁전 건설 지연으로 젊은 부부는 발렌타노 성에 머물러야 했다. 이듬해 그들의 첫 아들 알레산드로가 태어났다.[3]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는 루이지 오르시니와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줄리아 콘티의 딸이며, 피티리아노 백작의 손녀인 제롤라 마 오르시니와 결혼하여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설명 |
---|---|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 장남, 파르마 주교이자 로마 가톨릭 추기경[4] |
오타비오 파르네세 | 파르마 공작으로서 피에르 루이지의 후계자[4] |
라누초 파르네세 | 로마 가톨릭 추기경[4] |
비토리아 파르네세 | 구이도발도 2세와 결혼, 우르비노 공작[4] |
피에르 루이지는 로마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었으며, 1527년 로마 약탈에 참가했다.[1] 이후 1534년 그의 아버지가 교황 바오로 3세로 선출되자 교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사생아 아들 오라치오가 있었는데, 그는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사생아 딸인 디안 드 프랑스와 결혼했다.[4]
3. 군사 경력
3. 1. 용병 활동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는 대담하고 용감하며 강인했지만, 잔혹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또한 파르네세 가문의 전통적인 친(親)교황 성향과는 달리 교황청의 편에서만 싸우지는 않았다.
1520년, 17세의 나이에 형제 라누치오와 함께 베네치아 공화국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이후 카를 5세 휘하에서 복무하며 1527년 로마 약탈에도 참여했다.
형제 라누치오가 교황을 지키기 위해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반면, 피에르 루이지는 테베레 강을 건너 자신의 군대를 가문의 궁전에 주둔시켜 파괴를 막았다. 파르네세 가문이 양쪽을 모두 지원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역병이 퍼지자 황제군은 철수했다.
피에르 루이지는 로마 교외로 물러나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절도와 살인을 용인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파문을 경고했고, 추기경 알렉산데르는 아들을 교황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1528년, 피에르 루이지는 계속 황제의 고용 하에 만프레도니아 방어전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워 용맹을 떨쳤다.[1]
3. 2. 교황군 총사령관
1534년 그의 아버지가 교황 바오로 3세로 선출되자 피에르 루이지는 교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 그는 교황령을 지나 저항 세력을 격파하고 피아첸차에 개선하며 도착했다.
4. 통치자로서의 생애
피에르 루이지는 로마에서 훗날 교황 바오로 3세가 되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군인으로 복무하며 1527년 로마 약탈에 가담하기도 했다. 1537년에는 아내 제로라마 오르시니의 친가 오르시니 가문의 백작위인 피티리아노 백작을 물려받았다.
1534년 아버지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피에르 루이지는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아버지는 그를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카메리노와 네피 공작령을 받고, 카스트로 공작령과 론시글리오네 백작령도 소유하게 되었다.
피에르 루이지는 평생 동안 잔혹하고 냉정하며 사치스럽다는 평판을 얻었다. 또한 어린 사내아이들을 상대로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1537년에 발생한 "파노 강간" 사건은 그에 대한 평판을 더욱 악화시켰다.[5]
교황령의 온화한 통치에 익숙했던 시민들은 피에르 루이지의 강압적인 통치와 높은 세금 부과에 불만을 품었다. 특히 귀족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결탁하여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밀라노 공국에 합병시키려 했다.
1547년, 피에르 루이지는 귀족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피아첸차 궁전 창문에 매달렸고, 카를 5세의 대리자 페란테 곤차가가 공작령을 차지했다.
4. 1. 카스트로 공작
교황 바오로 3세는 라누치오 1세 사후 분할되었던 카스트로 주변의 가문 영지를 점차 회복했다.[4] 론칠리오네 영토를 추가했으며, 피에르 루이지에게는 세금을 내지 않고 곡물을 수출할 수 있는 "몬탈토" 칭호를 부여했다. 바오로 3세는 카니네, 그라돌리, 발렌타노, 라테라, 마르타에 대한 봉건적 권리를 인정했고, 피에르 루이지는 프라스카티 도시를 카스트로 요새와 교환, 몬테피아스코네 교구로부터 비젠치오를 매입했다. 바오로 3세는 이 영토를 공식 공작령으로 만들고 아들과 상속자에게 수여했으나, 공작령은 성좌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카스트로 공작령은 성 베드로 영토 내에서 기능하는 국가로 운영되었다.[4] 풍부한 사냥감, 비옥한 포도원과 밭, 많은 요새를 소유했다. 1537년 3월 14일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은 아들에게 네피와 론칠리오네 도시를 수여했다. 피에르 루이지는 봉건 영주가 된 모든 요새를 수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안토니오 다 상갈로 더 영거에게 새로운 수도 건설을 위임하여 요새, 공작 궁전, 조폐국이 건설되었다.
피에르 루이지는 잔혹함, 무자비함, 퇴폐로 악명이 높았다. 1537년, 군대를 이끌고 가던 중 도시의 젊은 주교 코시모 게리를 강간한 "파노 강간" 사건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고, 게리는 이후 사망했다.[5]
1538년, 아들 오타비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 딸 파르마의 마가렛과 결혼하여 파르네세 가문과 황실 간 우호를 다졌다. 1543년, 또 다른 아들 오라치오는 프랑스 앙리 2세의 사생아 딸 프랑스의 디안과 결혼했다. 1545년, 셋째 아들 라누치오는 바오로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4. 2.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작
1534년 아버지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피에르 루이지는 교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아버지는 그를 교황령의 일부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6] 피에르 루이지와 그의 아들 오타비오는 교황에게 매년 9천 두카토 금화를 내는 조건으로 카메리노와 네피 공작령을 받았다. 또한 카스트로 공작령과 라치오의 론시글리오네 백작령도 소유했다. 1546년 9월 23일 새로운 영지를 차지했다.
피에르 루이지는 잔혹하고 냉정하며 사치스럽다는 평판을 얻었고, 어린 사내아이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교황의 온화한 통치에 익숙했던 시민들은 강압 통치와 높은 세금에 불만을 가졌다. 특히 귀족층은 피에르 루이지에 반대하며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밀라노 공국에 합병시키려 했던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를 지지했다.
1547년 프란체스코 안귀솔라와 아고스티노 란디 백작, 조반니 루이지 콘팔로니에리, 지롤라모 알레산드로 팔라비치니 후작 등이 피에르 루이지 암살을 공모했다. 안귀솔라 등은 피에르 루이지를 칼로 찔러 죽이고 피아첸차 궁전 창문에 시신을 매달았다. 카를 5세의 대리자 페란테 곤차가는 공작령을 쟁탈했다.
4. 3. 통치 방식과 논란
피에르 루이지는 로마 태생으로 훗날 교황 바오로 3세가 되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사생아였다. 그는 군인이 되어 1527년 로마 약탈에 참가하였다.[4] 1537년에는 아내 제로라마 오르시니의 친가 오르시니 가문의 백작위인 피티리아노 백작을 물려받았다.1534년 그의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피에르 루이지는 교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아버지에 의해 교황령의 일부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평생 동안 피에르 루이지는 잔혹하고 냉정하며 사치스럽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어린 사내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성애 행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5] 특히 1537년에는 그가 군대를 이끌고 행진하던 중 도시의 젊은 주교 코시모 게리를 강간했다는 "파노 강간" 사건으로 큰 논란이 일었다. 게리는 이후 사망했다.[5]
교황들의 온화한 통치에 익숙해 있던 시민들은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높은 세금을 부과한 피에르 루이지를 싫어하게 되었다. 귀족층은 피에르 루이지에 반대하며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밀라노 공국에 합병시키고자 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를 지지하였다.[6]
1547년 프란체스코 안귀솔라와 아고스티노 란디 백작, 조반니 루이지 콘팔로니에리와 지롤라모 알레산드로 팔라비치니 후작 등은 피에르 루이지를 암살하려고 공모하였다. 안귀솔라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피에르 루이지가 죽을 때까지 칼로 찌르고 난 후에 피아첸차 궁전의 창문에 그의 몸을 늘어뜨렸다. 카를 5세의 대리자 페란테 곤차가는 공작령을 곧 쟁탈하였다.[7]
5. 암살
피에르 루이지는 평생 동안 잔혹하고 냉정하며 사치스럽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어린 사내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성애 행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6] 강압적인 통치와 높은 세금 부과로 인해 시민들의 반감을 샀으며, 특히 귀족층은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밀라노 공국에 합병시키고자 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를 지지하였다.[6]
1547년, 프란체스코 안귀솔라와 아고스티노 란디 백작, 조반니 루이지 콘팔로니에리와 지롤라모 알레산드로 팔라비치니 후작 등이 피에르 루이지를 암살할 공모를 꾸몄다.[6] 이들은 피에르 루이지를 칼로 찔러 죽인 후, 피아첸차 궁전 창문에 그의 몸을 매달았다.[6] 카를 5세의 대리인 페란테 곤차가는 곧바로 공작령을 점령하였다.[6] 밀라노 총독 페란테 곤차가는 황제의 목표를 알고 파르네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고, 앙구이솔라 후작과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를 지원했다.[6]
페란테는 피에르 루이지를 염탐하여 황제에게 보고서를 보냈고, 피에르 루이지는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2세 델라 로베레와 딸 비토리아를 결혼시키고 영토 요새화에 힘썼다. 카를은 파르마 공사를 우려하여 페란테에게 공작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도록 허락했다. 팔라비치니 코르테마조레 후작이 지원을 제안했지만, 페란테는 루이 곤자가, 카스텔 고프레도 영주, 카스틸리오네 영주, 그리고 그의 형제인 코모 총독 조반니 앙구이솔라 백작에게 의존했다. 앙구이솔라는 아고스티노 란디 백작, 조반 루이지 콩팔로니에리 후작, 지롤라모 알레산드로 팔라비치니를 설득하여 함께하도록 했다.[7]
이후 사건으로 인해 1551년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에게 공국이 반환되었다.[7] 아들의 죽음 이후, 교황 바오로 3세는 추기경 회의에서 페란테를 살인 혐의로 고발하고, 오타비오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선언했다.[7] 피에르 루이지의 시신은 피아첸차에 묻혔다가 파르마를 거쳐 볼세나 호수의 비센티나 섬에 있는 가족 묘지로 옮겨졌다.
6. 가족 관계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는 지롤라마 오르시니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 1520년 - 1589년 | 추기경 |
비토리아 파르네세 | 1521년 - 1602년 |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2세 델라 로베레와 결혼 |
오타비오 파르네세 | 1524년 - 1586년 | 파르마 공작 |
라누치오 파르네세 | 1530년 - 1565년 | 추기경 |
그는 또한 사생아 아들 오라치오 파르네세를 두었는데, 그는 프랑스의 왕 앙리 2세의 딸인 디안 드 프랑스와 결혼했다.[3]
참조
[1]
서적
La leggenda del papa Paolo III: arte e censura nella Roma pontificia
Bollati Boringhieri
1998
[2]
문서
[3]
서적
I Farnese
Parma
1950
[4]
웹사이트
Knight, Charles. "Farnese", Biography: Or, Third Division of "The English Encyclopedia", Vol. 2, 1867
https://books.google[...]
2023-03-17
[5]
간행물
Un avo poco presentabile
1998-01
[6]
웹사이트
Farnese s.v. Pierluigi Farnese
[7]
웹사이트
Dyer, Thomas Henry. Modern Europe 1521-1598
https://books.google[...]
G. Bell & Sons
2023-03-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